HMS 아거스 (I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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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HMS 아거스 (I49)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해군이 건조한 항공모함으로, 이탈리아 여객선 콘테 로소를 개조하여 제작되었다. 초기 설계는 두 개의 굴뚝이 있는 섬 형태였으나, 풍동 실험 결과 난류 문제가 발생하여 플러시 갑판 형태로 변경되었다. 아거스는 1918년 취역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참전하지 못했으나, 1920년대에는 갑판 착륙 시험과 훈련에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몰타로 항공기를 수송하는 클럽 런 작전과 토치 작전에 참여했으며, 1946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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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아거스 (I49)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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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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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명 | 아거스 |
명명 유래 | 아르고스 파놉테스 |
별칭 | 모자 상자 납작 다리미 |
표어 | (없음) |
약칭 | (없음) |
함 이력 | |
국가 | 영국 |
건조 | 윌리엄 비어드모어사, 스코틀랜드, 댈뮤어 |
기공 | 1914년 |
인수 | 1916년 9월 |
진수 | 1917년 12월 2일 |
취역 | 1918년 9월 16일 |
퇴역 | 1944년 12월경 |
재취역 | 1938년 7월 30일 |
재분류 | 1944년 12월, 숙박함으로 |
최종 운명 | 1946년 12월 5일, 고철로 매각 |
야드 번호 | 519 |
페넌트 번호 | I49 |
함선 특징 (건조 당시) | |
함 종류 | 항공모함 |
배수량 | (표준) |
길이 | (전장) |
흘수 | (만재 시) |
동력 | 12 × 원통형 보일러 |
추진 | 4 × 축; 4 × 증기 터빈 |
항속 거리 | at |
승무원 | 495명 |
무장 | 4 × 대공포 2 × 저각 4인치 포 |
탑재기 | 15–18대 |
제원 (일본어판) | |
만재 배수량 | 15,775톤 |
전장 | 172.5m |
수선장 | 170.68m |
전폭 | 20.7m |
흘수 | 6.4m |
비행 갑판 (길이 x 폭) | 준공 시: 143.3m x 25.9m 1943년: 167.0m x 25.9m |
엔진 | 파슨스식 직결 터빈 (고속, 저속) 2조 |
보일러 | 중유 전소 원통형 보일러 12기 |
출력 | 20,000hp |
속력 | 20.3노트 |
항속 거리 | 12노트/5,200해리 |
승무원 | 495명 |
무장 (준공 시) | 10.2cm (45구경) 단장 고각포 6기 7.62cm (40구경) 단장 속사포 3기 |
무장 (1943년) | 10.2cm (45구경) 단장 고각포 3기 2cm 단장 기관총 13정 |
장갑 | 舷측: 51mm (수선부) 갑판: 51mm |
탑재기 | 약 20기 |
2. 설계 및 건조 배경
'''아거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바퀴 달린 항공기를 이륙시키고 착륙시킬 수 있는 항공모함에 대한 영국 해군 본부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기존의 항공모함은 항공기 발진은 가능했지만, 비행 갑판이 없어 회수가 불가능했다.[1] 1912년 조선업체 윌리엄 비어드모어 앤 컴퍼니는 전장 비행 갑판을 갖춘 항공모함 설계를 제안했으나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중 기존 항공모함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이 설계가 다시 검토되었고, 해군 본부는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기에 적합한 선체를 물색했다.[1]
이에 따라 1914년 이탈리아의 로이드 사바우도사가 발주하여 글래스고의 비어드모어사에서 건조 중이던 대양 정기선 Conte Rosso|콘테 로소ita가 선정되었다. 이 선박은 전쟁 발발로 건조가 중단된 상태였으며, 기계 설비가 비교적 완성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1] 1916년 9월 20일 영국 해군에 구매되어 항공모함으로 개조 작업이 시작되었다.[1] ''아거스''는 처음 만들어질 때 평갑판 위에 구조물이 없는 형태로 설계되었으며,[62] 이는 항모 HMS 퓨리어스보다 먼저 선미와 후미가 나뉜 갑판 형태를 채택한 것이었다.[62]
항공기 격납고는 매우 크게 설계되었고 내부는 내화성 막으로 분리되었다. 이 덕분에 ''아거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운용된 영국 항공모함 중 유일하게 항공기 날개를 접지 않고도 격납고에 수용할 수 있었다.[63]
선박의 이름 '''아거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백안의 아르고스에서 유래했으며,[10] 야드 번호 519번으로 건조되었다. 노동력 부족으로 공사가 지연되어 1917년 12월 2일에 진수되었고,[11] 1918년 9월 16일에 취역했다.[12] 평평한 상부 구조 때문에 "모자 상자"(Hat Boxeng), "디티 상자"(Ditty Boxeng) 또는 "다리미"(Flatironeng)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13]
2. 1. 초기 설계와 변경
'''아거스'''의 건조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해군 본부가 바퀴 달린 항공기를 이륙시키고 착륙시킬 수 있는 항공모함을 확보하고자 했던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기존의 항공모함들은 항공기를 발진시킬 수는 있었지만, 착륙시킬 비행 갑판이 없어 회수가 불가능했다. 1912년, 조선업체 윌리엄 비어드모어 앤 컴퍼니는 해군 본부에 연속적인 전체 길이의 비행 갑판을 갖춘 항공모함 설계를 제안했으나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존 항공모함의 한계가 명확해지면서 이 설계는 다시 검토되었고, 해군 본부는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기에 적합한 크고 빠른 선체 두 척을 물색했다. 이탈리아 대양 정기선인 ''콘테 로소''(Conte Rossoita)와 ''줄리오 체사레''(Giulio Cesareita)의 건조가 전쟁 발발로 비어드모어 사에서 중단되었는데, 이 두 선박이 해군 본부의 기준을 만족시켰다. ''콘테 로소''는 기계 설비가 더 완성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1916년 9월 20일에 구매되었고, 비어드모어 사는 즉시 선박 개조 작업에 착수했다.[1]제임스 그레이엄, 6대 몬트로스 공작은 1912년 해군 본부에 "해군 항공기 및 어뢰정 구축함을 위한 모선" 설계를 제안한 바 있다. 이 초기 설계는 두 개의 섬(island) 형태 구조물 사이에 비행 갑판이 지나가는 형태였다. 각 섬에는 하나의 굴뚝이 있었고, 통제 불능 상태의 항공기를 막기 위해 두 섬 사이에 큰 그물을 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섬들은 버팀대로 연결되었고, 그 위에 함교가 설치되어 비행 갑판 위의 항공기를 위해 약 6.10m의 공간을 확보했다. 그러나 설계 초기 단계에서 비행 갑판 위의 난기류를 줄이기 위해 굴뚝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대신 배기 가스는 격납고 갑판과 비행 갑판 사이의 공간을 통해 후방으로 배출되도록 설계되었으며, 전기 팬으로 차가운 공기를 유입시키는 케이싱으로 둘러싸였다. 배기 가스는 일반적으로 비행 갑판 후미 아래로 배출되었지만, 필요시 두 개의 대형 전기 팬을 이용해 선체 후방 측면의 구멍으로 배출할 수도 있었다.[2]
1916년 11월, 이 설계안은 쌍둥이 섬 구조와 그 위의 함교가 야기할 수 있는 난기류를 평가하기 위해 영국 국립 물리 연구소의 풍동에서 실험되었다. 실험 결과, 이 구조가 실제로 난류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선박 건조가 거의 완료될 때까지 설계 변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
1918년 4월, HMS 퓨리어스 항공모함의 해상 시험에서 심각한 난기류 문제가 확인되자, '''아거스'''는 플러시 데크(flush deck) 구조, 즉 평갑판 형태로 개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비행 갑판 위에 어떤 구조물도 없는 형태(Flush Deck Typeeng)를 의미한다. 함교는 비행 갑판 아래에 설치되었고, 항공기 운용 외 시간에 항해를 위해 비행 갑판 중앙에 탈착식 조종실을 설치했다.[3] 항만 등 좁은 수로를 항해할 때 사용하기 위한 소형 조타 함교는 수압식으로 갑판 위로 올릴 수 있는 구조였다.[46]
3. 구조
''아거스''의 건조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해군 본부가 바퀴 달린 항공기를 이륙시키고 착륙시킬 수 있는 항공모함을 확보하고자 하는 필요성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기존의 항공모함은 항공기를 발진시킬 수는 있었지만, 비행 갑판이 없어 회수할 방법이 없었다.[1] 1912년 조선업체 윌리엄 비어드모어 사는 선수부터 함미까지 이어진 완전한 비행 갑판을 갖춘 항공모함 설계를 해군 본부에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존 항공모함의 한계가 명확해지자 이 설계가 다시 검토되었고, 해군 본부는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기에 적합한 크고 빠른 선체를 물색했다. 마침 전쟁 발발로 건조가 중단된 이탈리아 대양 정기선 ''콘테 로소''와 ''줄리오 체사레''가 비어드모어 사의 조선소에 있었고, 두 선박 모두 해군 본부의 기준을 충족했다. 이 중 기계 설비가 더 완성 단계에 가까웠던 ''콘테 로소''가 1916년 9월 20일 해군에 구매되어 항공모함 개조 작업이 시작되었다.[1]
초기 설계 논의 과정에서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제임스 그레이엄, 6대 몬트로스 공작은 1912년, 비행 갑판 양쪽에 섬 구조물을 두고 그 사이로 비행 갑판이 지나가는 형태의 설계를 제안했다. 각 섬에는 굴뚝이 있고, 두 섬 사이에는 항공기 제동용 그물을 설치하며, 섬들을 연결하는 버팀대 위에 함교를 설치하여 비행 갑판 위에 약 약 6.10m의 공간을 확보하는 구상이었다.[2] 하지만 설계 초기 단계에서 비행 갑판 위의 난기류를 줄이기 위해 굴뚝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대신 배기 가스는 격납고 갑판과 비행 갑판 사이의 공간을 통해 함미로 유도되어 배출되도록 계획되었다.[2]
1916년 11월, 국립 물리 연구소에서 풍동 실험을 통해 섬 구조와 함교가 난기류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3] 결정적으로 1918년 4월, HMS 퓨리어스의 해상 시험에서 심각한 난기류 문제가 드러나면서, ''아거스''는 상부 구조물이 없는 완전한 평갑판(Flush Deck Type|플러시 데크 타입영어) 형태로 최종 설계가 변경되었다.[3][46] 함교는 비행 갑판 아래에 설치하고, 항해 시에는 갑판 위로 올라오는 탈착식 또는 수압식 조종실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3][46]
''아거스''는 여객선 선체를 기반으로 개조되었기에 초기부터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상부 구조물 변경으로 무게 중심이 높아져 약 609628.20kg의 밸러스트를 추가했음에도 메타센터 높이가 낮아 선회가 불안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선체 및 안정성 섹션에서 다룬다.[4]
선박의 주요 제원은 전체 길이 약 172.21m, 폭 약 20.73m, 만재 흘수 약 7.01m이며, 배수량은 표준 약 14681879.15kg, 만재 약 15824932.03kg이다.[5] 비행 갑판은 길이 약 167.34m였고, 그 아래 격납고는 길이 약 100.58m, 폭 약 14.63m~약 20.73m, 높이 약 4.88m로, 날개를 접지 않은 항공기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확보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항모 중 유일한 특징이었다.[6][8][63] 항공기는 두 개의 엘리베이터로 운반되었으며, 격납고는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해 방화 커튼으로 분리되었다.[7][9] 자세한 내용은 #비행 갑판 및 격납고 섹션에서 다룬다.
무장은 초기에는 약 10.16cm 포 6문을 장착했으며, 탄약고 등 주요 구획은 약 5.08cm 두께의 장갑으로 보호되었다.[6] 자세한 내용은 #무장 섹션에서 다룬다. 기관은 4세트의 파슨스 기어 증기 터빈과 12개의 원통형 보일러로 구성되어 약 20.5 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5] 자세한 내용은 #기관 섹션에서 다룬다.
3. 1. 선체 및 안정성
''아거스''는 전체 길이 약 172.21m, 폭 약 20.73m, 만재 하중 시 흘수 약 7.01m의 선체를 가졌다.[5]선박의 안정성은 초기 설계 단계부터 주요 관심사였다. 원래 여객선으로 구상될 당시에는 롤링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선체였으나, 항공모함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상부 구조물의 무게가 늘어나면서 무게 중심이 높아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 609628.20kg의 밸러스트를 추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박은 가볍게 적재되었을 때 약 0.49m, 만재 하중 시 약 1.16m의 매우 낮은 메타센터 높이를 가졌다. 이는 선박이 매우 안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회전할 때 눈에 띄게 기울어지는 특성을 보였다.[4]
조종성 측면에서는 중간 및 고속에서 매우 기동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선체가 수면 위에 드러나는 표면적이 넓어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로 인해 저속에서는 조종이 어려웠다.[4]
3. 2. 비행 갑판 및 격납고
''아거스''는 선수부터 함미까지 이어진 완전한 평갑판을 갖춘 최초의 항공모함 중 하나였다.[1][46] 초기 설계에서는 비행 갑판 위에 구조물이나 두 개의 섬 구조를 고려했으나, 비행 갑판 위의 난기류 발생 우려와 HMS 퓨리어스의 해상 시험 결과[3] 등을 바탕으로 최종적으로는 상부 구조물이 없는 평갑판(Flush Deck Type|플러시 데크 타입영어) 형태로 결정되었다.[46][2] 함교는 비행 갑판 아래에 설치되었고, 항해 시 시야 확보를 위해 갑판 위로 상승하는 수압식 소형 조타 함교가 설치되었다.[46]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의 개장을 통해 비행 갑판 길이는 167.3m가 되었고, 폭은 25.9m였다.[46]
비행 갑판 아래에는 길이 100.6m, 폭 14.6m 에서 20.7m, 높이 4.9m의 넓은 격납고가 있었다.[6][63] 이 격납고는 넓은 공간과 높은 천장 덕분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운용된 영국 항공모함 중 유일하게 함재기의 날개를 접지 않고도 수용할 수 있었다.[8][63] 격납고 내부는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해 세 개의 방화 커튼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또 다른 커튼이 격납고와 선미 갑판을 분리했다.[9] ''아거스''는 약 15대에서 20대의 항공기를 탑재할 수 있었다.[16]

항공기는 두 개의 엘리베이터를 통해 비행 갑판과 격납고 사이를 이동했다.[7] 앞쪽 엘리베이터는 9.1m x 11m 크기였고, 뒤쪽 엘리베이터는 18.3m x 5.5m 크기였다.[7]
초기에는 강삭 종장식 및 기도식 종봉형 착함 제동 장치를 사용했으나, 제동 능력이 부족하고 항공기 파손이 잦아 1926년에 모두 철거되었다. 이후 약 5년간은 비행 갑판 양쪽에 '파리세이드'라 불리는 접이식 추락 방지책을 세우고, 착함하는 항공기를 정비원들이 직접 달려들어 멈추게 하는 위험한 방식을 사용했다. 1931년에 이르러서야 횡 방향 강선식 착함 제동 장치로 개장하여 안전한 착함이 가능해졌다.
배연(排煙) 방식은 굴뚝을 없애는 대신, 배기 가스를 격납고와 비행 갑판 사이 공간을 통해 함미 후방으로 유도하여 양현의 덕트로 배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2][49] 이는 비행 갑판 위의 난기류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으나, 격납고 공간을 일부 차지하고 배출되는 연기와 열기로 인해 격납고 내 작업 환경이 좋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다.[2]
3. 3. 무장
초기 무장으로 약 10.16cm 포 6문을 장착했다.[6] 이 중 4문은 대공포였으며, 두 문은 선미 갑판에, 한 문은 선체의 각 측면에 배치되었다. 나머지 2문은 저각포로 선체 양측에 각각 1문씩 장착되었다.[6] 다른 자료에 따르면, 이 6문의 포는 비행 갑판 아래 주갑판의 함미 격납고 전단부 좌우 각 1문, 전부 엘리베이터 좌우 각 1문, 격납고 후단부 좌우 각 1문에 위치했다.방어력 측면에서는 후방 탄약고와 어뢰 탄두 저장 탄약고는 모든 면에서 약 5.08cm 두께의 장갑으로 보호되었다.[6] 전방 탄약고와 폭탄 저장실은 약 5.08cm 두께의 갑판으로 보호되었다.[6] 선체 측면 수선부와 갑판부 역시 51mm 두께의 장갑을 갖추고 있어, 구축함의 포격에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3. 4. 기관
''아거스''는 4세트의 파슨스 기어 증기 터빈을 갖추고 있었으며, 각 터빈은 하나의 프로펠러 샤프트를 구동했다. 증기는 12개의 원통형 보일러에서 공급되었다.[5] 터빈은 총 20000shp를 내도록 설계되었으나, 1918년 9월 해상 시험에서는 21376shp를 생산하여 20.506kn의 속도를 기록했다. 선박은 약 2540117.50kg의 연료유를 탑재할 수 있었고, 10kn의 속도로 항해 시 3600nmi의 항속 거리를 가졌다.[5]비행 갑판을 평탄하게 유지하기 위해, 보일러실에서 나온 연기는 격납고 양 측면의 통로를 통해 함미로 보내졌고, 강력한 팬을 이용해 함미 양쪽에 설치된 굴뚝으로 강제 배출되었다. 이 방식은 함내 거주 환경을 매우 열악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해체된 V급 구축함과 W급 구축함에 탑재되었던 야로우식 중유 전소 수관 보일러 6기를 재활용하여 기존의 원통형 보일러를 교체했다. 이 개조를 통해 출력은 21500shp으로 약간 향상되었고, 최대 속력은 21.8kn에 달했다.
4. 함재기 운용
HMS 아거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다양한 함재기를 운용했으며, 시기에 따라 탑재 기종과 수량이 변동되었다. 주요 운용 내역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역 | 합계 |
---|---|---|
1920년 봄 | 소프위스 캐멀×4, 에어코 DH.9A×2, 페어리사제 플로트기×2 | 8기 |
1921년 봄 | 파르날 팬서×10, 페어리 III×3 | 13기 |
1922년 9월 | 글로스터 나이트자×⁇ | ⁇기 |
1940년 6월 | 제701 해군 비행대 (701 Squadon) | ⁇기 |
1940년 8월 | 제418 전투기 중대 (418 Flight RAF) | 14기 |
1940년 11월 | 허리케인×12, 스쿼×2 | 14기 |
1940년 12월 | 제821 해군 비행대 (821 Squadon) | 8기 |
1941년 3월 | 허리케인 Mk.II×12, 스쿼×3 | 15기 |
1941년 4월 | 제812 해군 비행대 (812 Squadon) | 12기 |
1941년 5월 | 제800 해군 비행대 (800 Squadon) | ??기 |
1941년 8월 | 제151 항공대 (151 Wing RAF) | 24기 |
1941년 9월 | 제828 해군 비행대 (828 Squadon) | 12기 |
1941년 11월 | 제818 해군 비행대 (818 Squadon) | ??기 |
1942년 2월 | 제812 해군 비행대 (812 Squadon) | ??기 |
1942년 3월 | 제804 해군 비행대 (804 Squadon) | 12기 |
1942년 5월 | 제807 해군 비행대 (807 Squadon) | 12기 |
1942년 6월 | 제807 해군 비행대 (807 Squadon) | 15기 |
1942년 11월 | 제880 해군 비행대 (880 Squadon) | 18기 |
4. 1. 착함 장비
"아거스"는 준공 직후 강삭(鋼索) 종장식 착함 제동 장치와 기도식 종봉형 제동 장치를 함께 사용했다. 하지만 강삭 종장식은 착함 제동 능력이 부족하여 항공기가 옆으로 미끄러져 비행 갑판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또한, 기도식 종봉형 제동 장치는 비행 갑판 위에 세워둔 봉에 착륙하는 항공기를 부딪혀 멈추게 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프로펠러나 날개가 손상되는 경우가 잦았다.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영국 해군은 1926년에 이 제동 장치들을 모두 철거했다. 그 후 5년 동안은 비행 갑판 전체를 활용하며, 비행 갑판 양쪽에 "파리세이드"라고 불리는 접이식 추락 방지 울타리를 세우고, 착함하는 항공기에 정비원들이 달려들어 멈추게 하는 매우 위험한 방식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 사이 프랑스 해군이나 미국 해군은 더 안전한 강선 횡장식 착함 제동 장치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영국 해군은 1931년이 되어서야 횡방향 착함 제동 장치(어레스팅 와이어)를 도입하여 실용적인 착함 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5. 제1차 세계 대전
1918년 9월 16일에 취역했지만,[12]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는 못했다. 취역 후 ''아거스''는 퓨리어스에서 옮겨온 종방향 착륙 장치를 이용한 갑판 착륙 시험 임무를 맡았다. 1918년 9월 22일, 로사이즈에 도착하여[49] 그랜드 플리트에 편입되었다. 같은 날, 일본 제국 해군의 쿠와바라 토라오 대위가 "아거스"를 방문하여 함내를 시찰하고 함장으로부터 설명을 들었다.[46] 이틀 뒤인 9월 24일, 턴하우스에 있는 그랜드 플리트 공군 기지 소속 소프위스 1½ 스트러터 비행기 2대가 ''아거스''에 처음으로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14]
같은 달, 함선 상부 구조물이 비행 작전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기 위한 시험도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캔버스와 나무로 만든 모형 함교와 굴뚝을 설치하고, 연기 상자를 이용해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모방했다.[50] 12월 19일까지 소프위스 1½ 스트러터와 소프위스 펍 항공기를 이용해 총 36번의 성공적인 착륙이 이루어졌다. 1919년 1월 24일에는 다른 일본 해군 관계자들이 본 함을 시찰했다[47].
1918년 12월 23일부터 1919년 3월 21일까지 ''아거스''는 착륙 장치를 개조했다. 이 개조는 착륙 유도 와이어를 갑판 위로 들어 올려 항공기 랜딩기어의 후크가 걸리도록 하는 방식이었으나, 이로 인해 비행 갑판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방 엘리베이터를 약 22.86cm만큼 낮추어, 엘리베이터가 비행 갑판과 같은 높이에 있을 때 항공기가 해당 구역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개조된 장치에 대한 시험은 1919년 4월에 시작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엘리베이터의 폭을 더 넓혔다.
1920년 1월, ''아거스''는 대서양 함대에 배속되어 봄 순항 훈련을 시작했다. 당시 함선에는 총 16대의 항공기가 탑재되었는데, 소프위스 1½ 스트러터 8대, 소프위스 캐멀 전투기 4대, 에어코 DH.9A 폭격기 2대, 그리고 페어리 수상 비행기 2대였다. 이 순항 훈련을 통해 항공기가 착륙 시 함선 측면으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려면 착륙 장치에 직접 착륙해야 한다는 중요한 운용 경험을 얻었다. 실제로 순항 중에 이러한 사고가 세 차례 발생하기도 했다.[15]
순항 훈련에서 돌아온 후, 1920년 5월 19일에는 ''아거스'' 함상에서 개정된 착륙 장치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과, 더 긴 와이어 시스템이 필요하며 기존의 착륙 웰(well) 시스템 대신 필요에 따라 올리고 내릴 수 있는 경사로로 대체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와이어에 걸리지 않은 항공기가 갑판 위에 머무르도록 돕는 동력식 팔리세이드(방책)를 비행 갑판 측면에 설치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이 개선된 시스템은 그해 후반 이글에서 성공적으로 시험되었고, ''아거스''의 착륙 장치 역시 1921년 봄 순항 훈련에 맞춰 개조되었다.
1921년 순항 훈련 동안 ''아거스''는 10대의 파넬 팬서 관측 및 정찰기와 3대의 페어리 IIIC 정찰기를 운용했다. 이 시기에는 후방 엘리베이터가 영구적으로 고정되었으며, 추가된 장비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약 152407.05kg의 밸러스트(무게추)가 함선 상부에 추가되었다. 이 순항 훈련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총 45번의 착륙 시도 중 단 두 번만 심각한 사고로 이어졌다. 이는 당시 육상 기지에서의 사고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다만, 항공기 2대를 발진시키고 1대를 착륙시키는 데 40분이나 걸렸는데, 이는 당시 사용되던 회전식 엔진의 시동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16]
한편, 제1차 세계 대전 중 비티 제독을 비롯한 일부 영국 해군 지휘관들은 소프위스 쿠쿠 (Sopwith Cuckoo영어) 복엽 뇌격기를 ''아거스''에 탑재하여 독일 제국 해군의 대양 함대 (Hochseeflottede)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현존 함대주의 전략을 고수하며 함대 결전을 피하던 독일 함대를 타격하기 위함이었다. 제185 비행대가 아거스에 배치되어 훈련을 진행했지만, 실제 작전에 투입되기 전에 전쟁이 끝나면서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6. 전간기 (1919-1939)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아거스''는 퓨리어스에서 시험했던 종방향 착륙 장치를 이용한 갑판 착륙 시험을 이어받았다. 1918년 12월 23일부터 1919년 3월 21일까지 개조된 착륙 장치를 재장착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장치는 항공기의 착륙 장치 후크와 결합할 수 있도록 와이어를 갑판에서 들어 올리는 방식이었으나, 비행 갑판 활용에 제약을 주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후방 엘리베이터를 약 22.86cm만큼 낮추어 엘리베이터가 비행 갑판과 수평을 이룰 때 항공기가 해당 구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시험은 1919년 4월에 시작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엘리베이터가 더 넓게 확장되었다.[14][15]
1920년 1월, ''아거스''는 대서양 함대에 합류하여 봄 순항을 시작했다. 당시 함재기는 십 스트러터 8대, 소프위스 캐멀 전투기 4대, 에어코 DH.9A 폭격기 2대, 페어리 수상 비행기 2대 등 총 16대였다. 운용 경험을 통해, 항공기가 착륙 장치 와이어에 직접 걸리지 않으면 함 측면으로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실제 순항 중 세 차례나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15]
순항에서 복귀한 후, 1920년 5월 19일 ''아거스''에서 착륙 장치 개선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더 긴 와이어 시스템과 필요에 따라 올리고 내릴 수 있는 경사로 형태의 착륙 웰 시스템, 그리고 와이어에 걸리지 않은 항공기를 갑판 위에 잡아 둘 동력식 팔리세이드(방책)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개정된 시스템은 그해 후반 이글에서 성공적으로 시험되었고, ''아거스''의 착륙 장치도 1921년 봄 순항에 맞춰 개조되었다. 이 순항 기간 동안 ''아거스''는 파넬 팬서 관측/정찰기 10대와 페어리 IIIC 정찰기 3대를 탑재했다. 또한, 후방 엘리베이터는 영구적으로 고정되었고, 장비 무게 증가를 상쇄하기 위해 함 상부에 약 152407.05kg의 밸러스트가 추가되었다. 이 순항은 총 45회의 착륙 중 단 두 번만 심각한 사고로 이어져 육상 기지의 사고율과 비슷한 수준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았다. 다만 당시 회전식 엔진의 시동 어려움 때문에 항공기 2대 발진과 1대 착륙에 40분이 소요되었다.[16]
1922년 9월, 글로스터 나이트자 전투기를 탑재한 ''아거스''는 차나크 위기에 대응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급파되었다. ''아거스''는 자체 함재기 운용 외에도, 수상기 모함 아크 로열이 수송해 온 브리스톨 파이터 전투기를 해협 유럽 측의 킬리아 비행장으로 발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비행 갑판이 없는 ''아크 로열''에서는 이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브리스톨 파이터는 크레인을 이용해 ''아거스''로 옮겨져 이륙했다.[17][52]
1922년 7월 실시된 경사 시험 결과, 건조 이후 추가된 중량으로 인해 횡경사 중심 높이가 약 0.25m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 안정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해군 건설 국장은 1923–1924년 해군 프로그램에 따라 함체 폭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수선 부근에 어뢰 방어 돌출부(벌지)를 장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훈련 임무 때문에 작업은 여러 차례 연기되었고, 최종적으로 1925–1926년 해군 프로그램에 따라 개조가 이루어졌다. 벌지 장착으로 만재 배수량은 약 17018787.25kg로 증가했고, 함체 폭은 약 22.56m, 흘수는 약 6.71m 약 25.40cm로 변경되었으며, 속도는 0.25노트 감소했다. 또한 대량의 가솔린 저장 시설, 고정 탄약을 사용하는 신형 4인치 포, 새로운 무선 마스트가 설치되었다.[18]
''아거스''는 1920년대 동안 일반적으로 약 15대의 항공기를 운용했다. 주로 소수의 전투기(글로스터 나이트자르 또는 페어리 플라이캐처), 정찰기(파넬 팬서 또는 에이브로 바이슨), 그리고 페어리 III 정찰 비행대로 구성되었다.[19]
1927년 선체 검사 결과, 향후 15년 동안 운용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6] 1928년 9월 1일부터 1929년 3월 20일까지 중국 기지에서 헤르메스의 임무를 대신했다.[20] 영국으로 귀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용 절감을 위해 플리머스에 14일 대기 상태로 정박했다. ''아거스''는 1921년 12월 9일 이전에 완성되었기 때문에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실험용 항공모함으로 분류되어 조약상 톤수 제한에 영향을 주지 않아 폐기되지 않았다. 1932년 9월에는 로스시스에서 확장 예비(4개월 대기) 상태로 전환되었다.[21]
1936년 2월, ''아거스''를 퀸 비(Queen Bee) 무선 조종 표적기 운용 모함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이 개조 과정에서 비행 갑판 폭을 약 3.05m 넓히고, 기존 보일러를 인버키싱에서 해체 중이던 V 및 W급 구축함에서 가져온 구축함형 보일러로 교체했다. 새로운 보일러는 터빈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증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21] 당초 유압식 항공기 캐터펄트 1기를 장착할 예정이었으나, 이는 아크 로열에 대신 설치되었다. ''아거스''는 해군 보조함으로 분류되면서 4인치 포가 제거되었다. 개조는 1938년 7월 30일에 완료되었고 다음 달 해상 시험을 거쳤다.[13][22][53][54] 표적 항공기 운반선(Target Aeroplane Carrier)으로 분류되어 1938년 8월 11일 W. G. 벤 대령의 지휘 아래 재취역했으며,[23] 이후 착함 훈련을 위한 연습 항공모함으로 사용되었다.
7.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아거스''는 리옹 만에서 조종사 착함 훈련을 위한 훈련 항공모함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940년 4월, 함선은 쿼터데크에 2문의 QF Mk V 4인치 대공포와 3개의 4연장 비커스 .50 기관총 마운트로 재무장되었다. 이 중 하나는 선체의 각 측면에 있었고, 세 번째는 쿼터데크의 선체 중심선에 위치했다.[24][25]
1940년 6월 중순, ''아거스''는 순양전함 HMS 후드 및 6척의 구축함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병력을 싣고 영국으로 향하는 호송선 US-3을 호위했다.[26] 일주일 후, 701 비행대의 슈퍼마린 월러스 수륙양용기를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로 수송했다. 이후 ''아거스''는 몰타로 항공기를 수송하는 임무(클럽 런)에 반복적으로 투입되었으며, 이는 하위 섹션 '몰타 항공전'에서 자세히 다룬다. 또한 1940년 8월 말에는 리버풀에서 날개를 제거한 호커 허리케인 30대를 싣고 출항하여 9월 5일 골드 코스트의 타코라디에 도착해 항공기를 하역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잠시 재정비를 거쳐[28] 10월 말에는 701 비행대를 다시 영국으로 수송했다.[29]
1941년 8월 말에서 9월 초 사이에는 영국 공군 제151 비행대 소속의 허리케인 24대를 소련의 무르만스크로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32][33] 이후에도 ''아거스''는 지중해와 대서양 등지에서 다양한 항공기 수송 및 호위 임무를 수행했으며, 토치 작전 등 주요 작전에도 참여했다. 전쟁 후반기에는 다시 훈련 항모 임무를 맡았고, 종전 후 퇴역하여 해체되었다. 자세한 전시 활동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7. 1. 몰타 항공전 (1940-1942)
1940년 7월 말, ''아거스''는 작전 허리(Operation Hurry)의 일환으로 몰타로 수송할 호커 허리케인 12대와 블랙번 스쿠아 전투기 2대를 영국 공군 418 비행대에 탑재했다. 항공모함 아크 로열, 3척의 전함, 2척의 순양함, 10척의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1940년 8월 2일 시칠리아 서쪽 지점에서 사고 없이 항공기를 발진시켰으나, 허리케인 2대가 착륙 중 추락하는 손실이 있었다.[27]
11월 11일, ''아거스''는 몰타로 보낼 허리케인 12대와 스쿠아 2대를 싣고 리버풀에서 다시 출항했다(작전 화이트, Operation White). 4일 후 H부대와 합류하여 11월 17일 아침 항공기를 발진시켰다. 그러나 강한 역풍으로 인해 허리케인 8대가 연료 부족으로 추락했고, 스쿠아 1대는 이탈리아 대공포에 손상되어 비상 착륙해야 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30]
12월 중순, 함선은 지브롤터로 향하는 페어리 소드피시 어뢰 폭격기 6대(821X 비행대)와 자체 방어를 위한 소드피시 2대(825 비행대)를 탑재했다. ''아거스''는 항공모함 퓨리어스 및 호송선단 WS-5A와 합류했으나, 12월 25일 독일 순양함 아드미랄 히퍼에게 발각되었다. ''히퍼''는 호위함에 의해 쫓겨나기 전 약간의 피해를 입혔다. 당시 ''아거스''에는 폭탄을 장착한 소드피시만 있었고, 어뢰는 ''퓨리어스''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 독일 순양함에 대한 즉각적인 공습은 불가능했다. ''퓨리어스''의 스쿠아기가 ''히퍼'' 수색을 위해 발진한 후, ''아거스''의 소드피시가 어뢰를 장착할 공간이 마련되었지만, 시야 불량으로 스쿠아기가 ''히퍼''를 찾지 못했다. ''아거스''는 821X 비행대를 지브롤터에 내려놓고 1941년 1월 14일까지 영국으로 돌아왔다.[30]
1941년 3월, ''아거스''는 허리케인 II 12대와 스쿠아 3대를 싣고 3월 29일 지브롤터에 도착시켰고, 이 항공기들은 며칠 후 ''아크 로열''에 실려 몰타로 발진했다. 4월 11일 영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교체용 소드피시 6대와 자함 방어용으로 812 비행대의 소드피시 6대를 탑재했다. 4월 14일 지브롤터로 출항하여 교체용 소드피시를 ''아크 로열''로 옮긴 후, 4월 24일 도착하여 2주간의 재정비를 받았다. 이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지브롤터로 보낼 허리케인들을 실었다. 이때 비스케이 만과 동부 대서양을 순찰하는 포케불프 Fw 200 콘도르 초계기의 위협에 대비하여 800X 비행대의 풀머 전투기 3대도 함께 탑재했다. 5월 31일 지브롤터에 도착하여 800X 비행대를 포함한 모든 항공기를 내린 후 영국으로 돌아가 재정비를 시작했다.[31]
1941년 9월 말, ''아거스''는 828 비행대의 페어리 알바코어 어뢰 폭격기 12대를 9월 30일 지브롤터로 수송했고, 이들은 최종적으로 몰타로 보내졌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804 비행대의 전투기를 수송할 계획이었으나 취소되었다. 대신 손상된 항공기를 싣고 10월 20일 이글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아거스''는 지브롤터로 향하는 추가 허리케인과 자함 방어용으로 818 비행대의 소드피시 2대, 804X 비행대의 시 허리케인 2대를 탑재했다. 11월 8일 지브롤터에 도착하여 허리케인 일부를 ''아크 로열''로 옮겼다. 이틀 후, 두 항공모함은 작전 퍼페추얼(Operation Perpetual)을 위해 시칠리아 서쪽으로 출항하여 허리케인 37대를 발진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전투기 3대가 손실되었다. 지브롤터로 돌아오는 길에 ''아크 로열''이 U-보트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면서, ''아거스''는 H부대를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항공모함이 되어 지브롤터에 머물게 되었다.[34][56]
이듬해인 1942년, ''아거스''는 작살 작전(Operation Harpoon)에 참여하여 이글과 함께 수송 선단의 간접 호위 부대(W 부대)에 합류하여 대잠 초계를 수행했다. 이 작전 중 이탈리아 공군기의 공격으로 직접 호위 임무를 수행하던 풀머 전투기 1기가 격추되기도 했다. 페데스탈 작전(Operation Pedestal)에서는 사전에 실시된 훈련에는 참가했으나, 탑재된 804 해군 비행대의 작전 수행 능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실제 작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7. 2. 토치 작전 (1942)
토치 작전에서는 영국-미국 상륙 부대에 대해 항공 지원을 제공했다. 작전 중이던 1942년 11월 10일, 독일군의 공습을 받아 약간의 손상을 입었으며 4명의 승조원이 전사했다. 11월 14일에는 호위 항공모함 아벤저(HMS Avenger, D14영어)와 함께 지중해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는 선단을 호위하기 위해 지브롤터를 출항했다. 그러나 다음 날인 11월 15일, 아벤저는 독일 잠수함 U-155에 의해 격침되었다.7. 3. 후기 활동 (1943-1946)
1943년 5월, 토치 작전 중 입었던 손상을 수리한 후 호위 항공모함으로 개조하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이는 취소되고 다시 연습 항공모함 임무로 돌아갔다. 1944년 9월 27일까지 조종사들의 착함 훈련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60] 이후 같은 해 12월에는 채텀에 정박하여 숙박함으로 사용되었다.[61] 1946년에 함선 목록에서 제외(제적)되었고, 이후 해체되었다.8. 평가 및 유산
''아거스''는 세계 최초의 전 평갑판 항공모함 중 하나로서, 현대 항공모함 설계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4] 비록 초기 설계의 한계로 속도가 느리고 무장이 빈약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귀중한 자산으로 활용되었다.
재취역 후, ''아거스''는 주로 조종사들의 착함 훈련을 위한 훈련 항공모함으로 운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리옹 만에서 이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1940년 4월에는 방공 능력 강화를 위해 쿼터데크에 2문의 QF Mk V 4인치 대공포와 3개의 4연장 비커스 .50 기관총 마운트를 추가로 설치했다. 이 중 두 개는 양현에, 나머지 하나는 선미 선체 중심선에 설치되었다.[24][25]
1940년 6월 중순, ''아거스''는 순양전함 후드 및 6척의 구축함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병력을 태우고 영국으로 향하는 호송선 US-3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26] 일주일 후에는 701 해군 항공대 소속 슈퍼마린 월러스 수륙양용기를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로 수송했다. 7월 말, ''아거스''는 작전 허리(Operation Hurry)의 일환으로 몰타 방어를 위해 호커 허리케인 12대와 블랙번 스쿠아 전투기 2대를 영국 공군 418 비행대에 탑재했다. 아크 로열, 전함 3척, 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의 강력한 호위를 받으며 1940년 8월 2일 시칠리아 서쪽 해상에서 성공적으로 항공기들을 발진시켰으나, 허리케인 2대가 착륙 중 손실되었다.[27] 이후 전함 밸리언트와 2척의 구축함 호위를 받으며 리버풀로 돌아와 날개를 분리한 허리케인 30대를 싣고 8월 22일 출항, 9월 5일 골드 코스트의 타코라디에 도착하여 항공기를 하역했다. 영국 복귀 후 잠시 정비를 마치고[28] 10월 말에는 701 비행대를 다시 영국으로 수송했다.[29]
11월 11일, ''아거스''는 다시 몰타로 보낼 허리케인 12대와 스쿠아 2대를 싣고 리버풀을 떠났다(작전 화이트). 4일 뒤 H부대와 합류하여 11월 17일 아침 항공기를 발진시켰지만, 강한 역풍으로 인해 허리케인 8대가 연료 부족으로 추락했고, 스쿠아 1대는 이탈리아 대공포에 피격되어 비상 착륙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12월 중순, 함선은 821X 비행대의 페어리 소드피시 어뢰 폭격기 6대를 지브롤터로 수송하고, 자체 방어를 위해 825 해군 항공대의 소드피시 2대를 탑재했다. 12월 25일, 호송선 WS-5A와 퓨리어스와 합류했을 때 아드미랄 히퍼의 공격을 받았으나, 호위함들의 대응으로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당시 ''아거스''에는 폭탄만 탑재된 소드피시가 있었고, 어뢰는 ''퓨리어스''에 실려 있어 즉각적인 반격은 어려웠다. ''퓨리어스''의 스쿠아가 수색에 나섰지만 악천후로 아드미랄 히퍼를 찾지 못했다. ''아거스''는 821X 비행대를 지브롤터에 내려준 뒤 1941년 1월 14일까지 영국으로 복귀했다.[30]
1941년 3월, ''아거스''는 허리케인 II 12대와 스쿠아 3대를 탑재하여 3월 29일 지브롤터로 인도했고, 이 항공기들은 며칠 뒤 아크 로열에 옮겨져 몰타로 보내졌다. 4월 11일 영국으로 돌아온 ''아거스''는 교체용 소드피시 6대와 자체 방어용으로 812 해군 항공대 소속 소드피시 6대를 실었다. 잠시 정비 후 4월 14일 다시 지브롤터로 출항하여 교체용 소드피시를 아크 로열에 인계하고 2주간 정비를 받았다. 이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지브롤터로 보낼 허리케인과 함께, 비스케이 만과 동부 대서양을 순찰하는 포케불프 Fw 200 콘도르 초계기로부터 함선을 보호하기 위해 800X 비행대의 페어리 풀머 3대를 탑재했다. 5월 31일 지브롤터에 도착하여 모든 항공기를 내린 후 영국으로 돌아와 정비에 들어갔다.[31]
1941년 8월 말에서 9월 초, ''아거스''는 영국 공군 제151 비행대 소속 허리케인 24대를 소련의 무르만스크로 수송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32][33] 이후 828 해군 항공대의 페어리 알바코어 어뢰 폭격기 12대를 9월 30일 지브롤터로 수송하여 몰타로 보냈다. 영국 귀환 중 804 해군 항공대 전투기 수송 계획은 취소되었고, 대신 손상된 항공기를 싣고 10월 20일 이글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아거스''는 다시 지브롤터로 향하는 허리케인을 더 탑재하고, 자체 방어용으로 818 해군 항공대 소드피시 2대와 804X 비행대 시 허리케인 2대를 탑재했다. 함선은 11월 8일에 도착하여 허리케인 일부를 아크 로열로 옮겼다. 이틀 후, 두 항공모함은 작전 퍼페추얼(Operation Perpetual)의 일환으로 시칠리아 서쪽으로 출항하여 허리케인 37대를 발진시켰으나, 전투기 3대가 이동 중 손실되었다. 아크 로열은 지브롤터로 돌아가는 동안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고, 이로 인해 ''아거스''는 H부대를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항공모함이 되어 지브롤터에 머물게 되었다.[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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